제10회 마리끌레르 영화제에 대한 단상

2023. 5. 31. 13:53영화제 리뷰 및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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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기점인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어느덧 열 번째를 맞이하는 마리끌레르 영화제를 갔다 왔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문한지 38일이 지났죠. 진작 썼어야 하는 포스팅인데, 나름 바빴기도 하고 귀찮다는 이유를 핑계로 계속해서 미루다 이제서야 쓰게 되네요. 사실 영화제에 갔다 왔다고는 하지만, 영화제의 마지막 날인 하루만 가볍게 즐기다 왔기 때문에 거창하게 풀어낼 부분은 없을 것 같네요. 그냥 영화제에서 감상하였던 작품 세 가지를 간단하게 리뷰하는 형식으로 글을 쓸 생각입니다.

 

 

 

1. 러브 라이프

후카다 코지 감독의 신작이죠. 사실 후카다 코지는 영화계에서 나름 주목을 받고 있는 감독으로 알고 있는데, 저는 이 감독의 영화를 '러브 라이프'로 처음 접했습니다. 이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에 무려 경쟁 부문으로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한 마디로, 이 영화를 어떠한 정보도 기대도 없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고 듣기도 했고, 후카다 코지 감독의 작품을 하나 정도는 봐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예매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감상한 뒤, 저는 적잖게 놀랐습니다. '러브 라이프'는 분명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밀양' 등 여러 영화가 머릿속에서 오버랩되지만, 결코 그들의 하위 호환이라 생각되는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후카다 코지 감독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감상하면 할수록 다른 영화들을 많이 생각나게 합니다. 저는 특히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가 제일 많이 떠올랐습니다. '아사코'에서의 아사코처럼, '러브 라이프'의 여주인공 또한 삶의 기로에 있어 두 번의 선택을 하게 되기 때문이죠. 과연 그녀의 선택이 그녀의 삶, 객관적 윤리, 타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불러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영화를 통해 그녀의 과거와 아픔을 전달받은 관객들이라면 그녀의 선택을 그저 한탄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죠. 또한 일본 영화 특유의 가족을 다루는 방식과 아름다운 촬영이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후반부에 등장하는 한국 시퀀스는 누군가에게는 그동안 쌓아온 영화의 흐름을 깨는듯한 이질감을 선사할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한국 시퀀스를 바라보면서 다소 의아함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좋은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는 어느덧 흔해진 요즘이지만, 그러한 흔한 메시지를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내는가에 따라 영화의 좋고 나쁨이 갈린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물론 좋은 쪽입니다. 

 

점: ★★★

 

 

 

2. 조이랜드

지방에 살기도 하고 영화제의 하루밖에 즐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서 간 이유는, 바로 이 영화 때문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너무 궁금한 작품이었거든요. 이미 해외에서 좋은 평을 듣기도 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놉시스가 너무 끌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동남아 여행을 베트남, 파키스탄, 필리핀, 태국 총 네 곳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그 네 번의 여행 중, 총 두 곳에서 트랜스젠더 분들을 보았습니다. 동남아 여행은 저에게 그(녀)들은 무엇을 계기로 남들과는 다른 삶을 택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그(녀)들을 품는 나라의 사회의 분위기를 어떨까 등 많은 궁금증들이 파생된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조이랜드'가 파키스탄 감독이 만든 젠더와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홀린 듯이 이 영화를 예매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통해 비추어 본 파키스탄의 현재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시대상이었습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남성우월주의는, 전위적이고 능력 있는 여성보다 본인들의 사회상에 걸맞은 성별을 지니고 태어난 남성 그 자체를 더 나은 인물로 판단하죠. 그러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적인 시대상은, 새로운 단계로의 도약 가능성이 거세된 기약 없는 정지된 사회의 분위기를 빚어내게 됩니다. 그러한 사회에서 여성과 자국의 사회상에서 우월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남성이라는 무기를 스스로 떼어낸 트랜스젠더는, 똑같은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들과 동등한 대우를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현재의 파키스탄이 딱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영화는 그러한 시대 속에서 모순된 세상의 불합리함에 맞서 투쟁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을 스크린에 강렬하게 담아냅니다. 쉴 새 없이 내뿜는 영화의 에너지에 압도당하다 마주하는 처연한 엔딩은, 끝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감독의 회의감이 느껴집니다. 극 특유의 분위기를 빚어낼 줄 아는 탁월한 촬영 또한 놀랍습니다. 사임 사디크라는 파키스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데,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점: ★★★

 

 

 

3. 차이콥스키스 와이프

작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른 작품이죠.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작품인데, 이름부터 되게 어렵네요. 저도 이름은 처음 들어봐서 모르는 감독인 줄 알았는데, 필모그래피를 보니 '레토'를 만든 감독이더군요. '레토'를 본 적은 없지만, 워낙 유명한 영화이기에 알고는 있습니다. 또한 그의 다른 작품은 '페트로프스 플루'라는 영화도 알고 있고요. 여하튼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작품은 이번 '차이콥스키스 와이프'가 처음이었는데, 처음에는 안 볼 생각이었습니다. 앞서 리뷰한 '러브 라이프'와 '조이랜드'를 연속으로 본 다음 밥도 먹지 못하고 바로 이어서 봐야 했기에, 컨디션 난조로 제대로 된 감상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언제 개봉할지도 모르는 영화이기도 했고, 칸영화제 경쟁작이었기에 어떤 영화일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졸린 눈과 배고픔을 참고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 방향에서만 과도하게 불타오르는 사랑은 한쪽에게는 관심의 과다 복용을, 또 다른 한쪽에게는 너무나도 큰 공허함을 불러일으킬 것이죠. 그러므로 한 사람의 진심으로만 이루어진 이상적이지 않은 사랑은,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점을 영화는 전제로 진행됩니다. 차이콥스키의 아내, 그러니까 영화의 여주인공은 차이콥스키에게 한눈에 반해 일종의 계약과도 같은 일방적인 사랑을 하게 됩니다. 비록 그녀가 차이콥스키를 죽을 만큼 사랑한다 할지라도, 차이콥스키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그녀만의 일방적인 사랑은 결국 차이콥스키를 향한 집착을 불러오고, 그러한 집착은 결국 본인의 삶을 파멸로 이끌고 맙니다. 클래식의 지루함을 보는듯한 몇몇 쇼트들과 그녀의 삶의 끝없는 추락만을 계속해서 보고 있으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재적소에 배치된 롱테이크와 피아노 선율이 그녀의 비극을 더욱 처연하게 만들며 극의 흥미를 이끌어냅니다. 무엇보다 여배우의 연기가 뛰어납니다. 이번 작품이 데뷔작인데, 앞으로 그녀의 연기를 더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점: ★★★

 

 


'러브 라이프'를 볼 때 여러 가지 이슈가 있었습니다. 영화가 오전 11시 정각에 시작해야 했었는데, 10분 빠른 10시 50분에 시작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뭐지 싶었지만, 그래도 틀어주니까 보기는 했습니다. 근데 영화가 시작한 지 20분 정도 뒤에 갑자기 상영이 중지되더니, 관계자분이 오셔서 실수로 상영을 10분 일찍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다시 틀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평소라면 크게 여의치 않아 했겠지만, '러브 라이프'를 다 보고 바로 '조이랜드'를 보러 가야 했기에 처음부터 다시 틀면 점심을 먹을 시간이 남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저의 힘으로 상영을 강행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냥 처음부터 다시 봤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시간 뒤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아침을 먹지 않아서인지, 영화를 보는데 배에서 자꾸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2시간 중 뒤의 1시간은 제대로 된 감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러브 라이프'는 그러한 좋지 않은 환경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기에, 조만간 정식 개봉을 하면 한 번 더 재감상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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