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2022년도 영화 TOP 10

2022. 12. 31. 22:04지극히 개인적인 순위 매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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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길게만 느껴졌던 2022년도도 이젠 끝이 나고 2023년이라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할 해를 맞이할 순간이 다가왔다. 2019년 코로나의 창궐로 인하여 전 세계 문화산업이 침체되고 영화계 또한 그 여파를 직격으로 받았기에, 전만큼 좋은 영화들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코로나의 여파가 약해지면서 세계는 다시 2019년 이전의 활발했던 시기로 서서히 회귀하기 시작하였고, 영화산업에도 그동안 목이 빠져라 기다려왔던 부활의 신호탄이 울렸다. 이번 2022년도에는 확실히 코로나가 한창 활개를 치던 지난 3년보다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마주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영화적으로 풍성한 한 해가 될 수 있었다. 좋은 영화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던 한 해였던 만큼 내가 봤던 좋은 영화들을 짤막하게나마 소개하는 글로 2022년도를 마치고자 한다. 지금부터 소개할 2022년도 영화 TOP 10 리스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통한 의견이니 이 리스트를 어떠한 결론으로 굳히는 것이 아닌 참고 정도로만 봐주면 좋겠다.
 
 
 
10.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사실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런 생각도 정보도 없이 영화를 접하였다. 이유는 이 영화를 만든 감독들의 전작인 '스위스 아미 맨'을 그다지 흥미롭게 감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스위스 아미 맨'을 감상한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주제의식은 좋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이 과하게 다가온다는 느낌에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던 것만큼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또한 포스터와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스위스 아미 맨'과 상당히 비슷한 결을 띄고 있는 작품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에 별 기대 없이 작품에 임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후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영화 흥행의 역사를 새로이 쓴 마블 프랜차이즈 시리즈에서 수없이 다뤄왔기에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멀티버스라는 소재와 휴먼드라마 장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흔한 소재 둘을 섞어 이토록 새로운 감흥을 전달할 줄 아는 영화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다소 어처구니 없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의 과한 컨셉에 스스로 잡아먹히지 않고, 끝내 올곧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야 마는 영화의 뚝심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보통 이처럼 특이한 컨셉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면 스타일만 남아버리는 속이 텅 빈 껍데기 같은 영화들이 참 많은데, 겉만 화려하지 않고 속까지 꽉꽉 채워진 이 영화를 보고 감독의 연출에 대한 의구심이 날아갔다.

평점: ★★★★



09. 아마겟돈 타임

제임스 그레이는 이미 영화계에선 명실상부 명감독으로 인정받는 예술가이기에,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동안 봐왔던 제임스 그레이의 작품들은 모두 좋은 영화라고 생각은 하지만, 기억 속에 남을 정도의 여운을 준 작품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워낙 자전적인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를 좋아하는 나이기에, 이번에는 제임스 그레이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칸 영화제에서도 좋은 반응을 보였고 허문영 영화 평론가 또한 이번 칸 영화제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말을 남겼기에 충분히 기대를 할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는 내 기대치에 합당한 결과물을 충분히 도출해냈다고 생각한다.

일단 영화를 보면서 누벨바그가 낳은 거장 중 한 명인 프랑수와 트뤼포 감독의 걸작인 '400번의 구타'가 많이 생각났다. 진짜 좋은 영화는 보면서 다른 영화가 생각나지 않는, 새로운 여운을 주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도 그 말에는 동의를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또 다른 걸작의 이미지가 생각하게 하는 영화 또한 매우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아마겟돈 타임'은 후자에 완벽히 부합하는 좋은 영화라고 확신한다. 감독 본인의 생을 담은 자전적 영화이기에 감정적으로 과잉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절제를 갖추고 담담하게 본인의 어린 시절을 영화라는 예술로 각인시킨 이 작품이 놀랍다.

평점: ★★★★



08. 본즈 앤 올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상당히 기대를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감독의 전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보여준 구아다니노의 촬영과 티모시 살라메라는 배우의 아름다움을 담는 방식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감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즈 앤 올'의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에는, 감독이 이런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냈을지가 너무 궁금했다. 또한 이번 베니스 영화제에서도 감독상이라는 걸출한 결과를 내보였기에 더욱 기대치를 증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영화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어떤 관객들은 스토리가 10대 판타지 소설을 읽는듯한 유치함이 공존한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유치한 컨셉의 각본을 이렇게도 아름답게 꾸며내는 것도 영화의 대단한 장점이라고 변호해 주고 싶다.
 
영화는 내가 감독에게 기대했던 것들을 기본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선에서 멈추지 않고, 그 이상의 것들을 보여줬다. 일단 구아다니노의 전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느꼈던 촬영의 아름다움과 티모시 살라메라는 배우의 빛남을 이 영화에서도 똑같이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카니발리즘이라는 컨셉을 사회에서 멸시당하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를 지니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아픔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차용하여 영화의 파격성을 높이는 데에 사용했다는 점 또한 놀랍게 다가왔다. 그리고 감독의 또 다른 작품들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서스페리아'를 연출하면서 터득한 로맨스와 스릴러 장르를 이 영화에서 탁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구아다니노는 이미 대단하지만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성장 중인 대단한 예술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평점: ★★★★



07. 탑

홍상수 감독은 늘 그의 작품을 가디라는 것에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그의 작품을 보고 난 후 절대 실망할 일이 없게 만든다. 2022년의 신작인 '탑' 역시 그랬다. 어떤 사람들은 홍상수의 작품들을 논할 때 홍상수는 '북촌방향'을 만들 때가 최고의 전성기였고, 그 이후는 점점 자기복제를 통한 푸념만 찍어내는 영화공장으로 전략하였다는 말을 하곤 한다. 물론 나도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 시절의 홍상수를 가장 좋아하지만, 그 이후에 내는 작품들도 본인의 삶을 투영시키고 그 안에서 세세한 변화를 거듭하며 발전하는 흥미로운 실험적 요소가 담긴 훌륭한 작품들을 낸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입장을 완벽하게 대변해주는 작품이 바로 '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화감독 홍상수와 인간 홍상수의 차이를 모른다. 일상에서 그를 곁에 두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인간 홍상수가, 그저 그의 영화를 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영화감독 홍상수가 먼저 보일 것이다. 극 중 딸이 자신의 아빠는 영화감독으로서는 훌륭할지 몰라도 아빠로서는 매우 별로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실제로도 그의 딸은 그를 좋지 않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간 홍상수가 아닌 영화감독 홍상수만을 마주해본 관객의 입장에서는 일상을 영화라는 예술에 마법처럼 담아내는 예술가인 그를 예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간 홍상수를 증오하기보단, 영화라는 예술로 관객들에게 영화를 보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영화감독 홍상수를 사랑하겠다. 이 영화는 적어도 나에게 이러한 입장에 확신을 가져다준 영화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평점: ★★★★



06. 퍼시픽션

이 작품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접하였다. 사실 '퍼시픽션'이라는 영화를 처음 보면서 알베르토 세라란 감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는 약간의 사전 정보조차 알지 못했기에 이 영화를 선택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여러 군데에서 알베르토 세라 감독은 믿고 볼 만한 감독이라는 말을 듣고, 또 다른 기대작이었던 '성스러운 거미'를 뒤로 하고 '퍼시픽션'을 택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향씨어터에서 처음으로 '퍼시픽션'을 접하였을 때는 3일 동안 영화 강행군으로 몸을 혹사시켰던 상황이었기에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로 영화를 감상하였고, 결과는 졸음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며칠 전 영상자료원 사사로운 리스트에서 뽑힌 '퍼시픽션'을 특별 상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볼 기회라고 생각하고 바로 감상을 하러 갔다. 그리고 영화를 본 직후엔 다시 한번 재감상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2시간 45분이라는 상당히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고, 각본의 호흡 또한 느린 편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영화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이토록 사랑하고 추천하는 이유는 그러한 긴 호흡에서 오는 탁월한 각본의 밀도와 미장센 때문이다. 정부는 시민들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의 의무를 품고 있는 정의로운 집단이어야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정부의 존재 의미는 점점 흐릿해지고 끝내 시민들은 그저 국방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발전의 희생양으로 변질되고 만다. 영화는 아름다운 섬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정부의 개입을 나타내는 미장센과 서서히 정부에 잠식당하는 사람들을 슬로우 시네마로 완벽하게 스크린에 구현해낸다.

평점: ★★★★☆



05. 부서지는 파도

사실상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를 가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와도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라브 디아즈의 영화를 '아 프리오리'와 '하의 이야기' 단 두 편밖에 감상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 두 편만으로도 라브 디아즈라는 감독의 진가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기에 이번 신작도 굳게 믿고 봐보기로 했던 것이다. 또한 평소 라브 디아즈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3시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었고, 시놉시스도 대강 훑어보니 평소 그가 자주 다루던 필리핀의 역사가 아닌 현시대의 필리핀을 다루는 영화였기에 필리핀의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보게 된 '부서지는 파도'는 나에겐 '이니셰린의 밴시'와 함께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작품이 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필리핀의 역사를 주로 다루던 라브 디아즈였기에 그가 찍어낸 필리핀의 현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흑백의 톤으로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담은 필리핀의 공간들은 변질된 정부와 마약 등으로 어지럽혀진 사회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필리핀 시민들의 삶의 어두움이 뼈 속까지 진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퍼시픽션과 비슷한 감상을 남기는 영화인데, 슬로우 시네마로 정부의 행태에 대한 고발과 탁월한 미장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두 작품 다 비슷한 결을 띄고 있는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한 나라의 잘못된 정치는 시민들의 삶에도 침투되고, 그러한 시민들의 삶은 결국 파도에 부딪혀 깎여나가는 집처럼 서서히 무너진다는 모순에 대하여 말한다. 라브 디아즈는 점점 변질되어가는 자신의 조국에 대한 본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표현해내는 매우 훌륭한 작가주의적 감독이다.
 
평점: ★★★★☆



04. 헤어질 결심

결론부터 말하면 걱정 반 기대 반이었던 영화였다. 칸 영화제 감독상이라는 걸출한 결과를 빚어낸 작품이기도 하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한국 감독들 중에선 국제적으로 가장 명성을 떨치는 명감독 중 하나인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었기에 기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평소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대한 호불호의 편차가 심한 편이었기에, 이번 작품도 안 좋으면 어쩌지라는 걱정 또한 함께 들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까보니, 내가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을 비웃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었다.

물론 박찬욱은 매우 훌륭한 작가주의적 성향을 띤 명감독이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욱의 신작을 걱정했던 이유는 자신만의 색깔이 영화에 너무 강렬하게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친절한 금자씨'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인 '헤어질 결심'에서는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많이 절제하고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갔다는 느낌이 절로 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대중친화적인 스타일을 들고 나왔다. 일련의 인터뷰에서 들은 박찬욱 감독의 말에 따르면 흥행을 하고 싶어서 힘을 많이 뺏다고 들었는데, 세계적으로 숱한 명성을 날리는 명감독들도 흥행에 대한 고민이 있다는 점이 웃펐던 기억이 난다. 여하튼 '헤어질 결심'은 매치 컷과 다양한 숏의 활용 등 수많은 촬영 기법이 들어갔지만, 일반 관객들도 그러한 촬영 기법들을 몰라도 충분히 시각적 화려함으로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도 박찬욱 감독의 이렇게 힘을 빼고 신작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이다.

평점: ★★★★☆



03. 우연과 상상

사실 '우연과 상상'은 이번 연도에 개봉하였지만, 나는 작년에 열린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먼저 감상하였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요즘 예술영화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인 감독이기도 하고 전작들인 '해피 아워'와 '드라이브 마이 카'를 워낙 좋게 봤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이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작년에 다른 관객들보다 발 빠르게 보고 싶은 마음에 인생 처음으로 서울독립영화제에 방문하여 '우연과 상상'을 만났고, 다 본 순간 2022년에 나오는 모든 영화들도 이 영화를 넘긴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연과 상상'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또 다른 걸작들인 '해피 아워'와 '드라이브 마이 카'와 같이 힘을 주고 만든 작품이 아닌, 소품 느낌이 나는 작품이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한 두 작품처럼 진한 여운을 남기지는 못하지만, '우연과 상상'은 이 작품만이 가지고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 따른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수많은 우연을 마주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우연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 우연이 삶에 어떠한 방식으로 작용할지에 대한 감독의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한낱 '우연'이라는 것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한 감독의 상상력이 매우 흥미롭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홍상수 이후로 삶의 우연이라는 것에 대해 가장 흥미롭게 다룰 줄 아는 씨네아스트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평점: ★★★★☆



02. 소설가의 영화

어쩌다 보니 2022년도 영화 TOP 10 리스트에 홍상수 감독 작품이 2개나 들어갔지만 어쩔 수 없다. 그만큼 걸작들만 찍어내는 명감독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영화'는 앞서 언급하였던 '탑'보다 훨씬 놀라운 경험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일상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우연과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을 동력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의 결말을 마주하게 된 순간 나는 가히 그동안의 홍상수 감독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작품에서 홍상수는 또 한번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봐왔던 대부분의 홍상수 영화의 매력은 서사에 힘을 주어 연출하기보단,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마법 같은 순간을 포착하여 즐거움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특별한 연출 방식과 그러한 연출에 담겨지는 일상의 흥미로움과 아름다움 등 대부분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서사가 아닌 다른 연출적인 표현에서 보여지는 영화적 황홀함이 확연히 느껴진다. 이번 작품에서는 초반부부터 영화의 기본 요소 중 하나인 언어적 소통을 배제하고 새로운 영화적 언어를 창조하는 듯한 신호를 준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일상에서 벌어지는 우연과 본인 실제 삶의 투영을 통해 극을 흥미롭게 변주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은 결말에 등장한다. '소설가의 영화'의 결말은 그동안의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선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던 아름다움과 처연함이 느껴지고, 이를 통해 홍상수는 '또'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평점: ★★★★★



01. 메모리아

작년에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본가인 천안에서 부산까지 당일치기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하기로 결심하게 해준 영화이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감독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신작이다. 사실 병적으로 좋아하는 감독의 신작이라 평소 아피찻퐁 작품의 스타일을 잘 알기에 이 감독의 영화는 절대 한국에서 수입이 안 될 것이라는 무언의 확신이 있었고, 그렇기에 작년에 무리를 해서라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연도에 이 영화가 극장에서 정식 개봉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운 동시에 뛸 듯이 기뻤다. 아피찻퐁의 영화가 드디어 한국에도 정식 개봉을 하는 순간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과 그의 작품들을 다른 관객들도 쉽게 영화관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또한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번 연도 부동의 1위로 뽑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영화의 가장 대단한 점은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네마의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영화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뭔가 느껴졌다는 것만으로 명작이라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 방식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의 과도한 해석을 지양하게 하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여러 가지의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갑자기 울리는 차들의 경적 소리, 초반부에 갑자기 사라지는 에르난, 그리고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결말의 '그 장면'까지 영화에서는 알 수 없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한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이 영화에 대한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영화라는 예술은 꼭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관객이 이미지를 보고 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해석을 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러한 영화예술에 가장 부합하는 예술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봤거나 볼 예정인 분들에게는 모든 장면들에서 정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해석을 하며 영화를 즐기길 바란다.

평점: ★★★★★



아쉽게 리스트에 들지 못한 또 다른 좋은 10편의 영화들(순서 무관)
-어나더 라운드
-맥베스의 비극
-리코리쉬 피자
-스펜서
-파리, 13구
-애프터 양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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