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사회를 바라보는 순수한 시선 -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EO>

2022. 10. 31. 17:52장문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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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 글에도 후술했듯이, 나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EO'를 보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인 로베르 브레송의 작품은 '당나귀 발타자르'를 재해석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예지 스콜리모프스키라는 감독 자체를 처음 접하였고, 'EO'를 보기 직전까지도 이 감독에 대해 알아보거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당나귀 발타자르'를 재해석하였다는 작품이라는 것 자체에 이미 홀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기대감을 품은 채로 'EO'를 보기 위하여 서울동물영화제로 떠났다. 영화제는 메가박스 홍대에서 개최되었는데, 할로윈 기간과 겹쳐 거리에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래도 영화관 안을 들어오니 그나마 사람 수가 줄어들어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모바일 입장권으로 입장을 해도 되지만, 나는 지류 티켓을 수집하기 때문에 지류 티켓을 뽑기 위해 티켓 발권기로 향했다.

 

그런데 티켓 발권기 방향이 모두 막혀있는 것이 아닌가. 나중이 이유를 들어보니 옆 건물은 CGV 홍대에서 영화 '리멤버' 무대인사를 가진 배우 남주혁 배우가 이 건물에 방문을 하여 혼란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쳐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는 'EO'를 보기 전 시간이 남아 그 무대인사에 참석하고 오는 차였다. 그렇게 1시간 전에 이미 남주혁 배우를 실물로 봤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다른 티켓 발권기로 가 지류 티켓을 뽑고 상영 층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끝에, 나는 끝내 'EO'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영화의 오프닝은 강렬하다. 빨간 조명이 화면을 뒤덮고 역동적인 숏으로 서커스에서 구경거리가 된 EO를 비추면서 시작한다. EO와 같이 서커스를 하는 사람은 한 여성이었다. 그 여성은 진심으로 EO를 사랑하고 EO도 그 여성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서커스 동료는 EO를 그저 하찮은 동물로만 여겼고, 그런 EO를 자신의 수레를 끄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여자는 그를 저지했지만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동물보호협회 단체의 눈에 들어 EO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EO는 과연 여자의 품을 벗어나 또다른 사람에게 길들여지는 것에 대해 진정 긍정적으로 생각할까? 동물을 말을 하지 못하니 확답을 들을 순 없다. 하지만 동물의 눈은 진실만을 말한다. 순수라는 것은 진작에 없어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주할 수 있는 순수는 동물의 눈이다. EO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관적인 판단만으로 동물의 행복을 함부로 정의한다.

 

시위는 폭력적으로 진행되었으며, EO와 여자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그들은 동물을 구해야겠다는 일차원적인 정의감에 사로잡혀 그들 마음대로 다른 존재의 행복을 판단해버린다. 이것은 모두 정의를 원하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폭력이라는 모순에서 비롯된 참사이다. 그리고 인간들의 산물로 여겨지는 EO는 그런 참사의 희생당하는 생명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EO는 타의에 의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주인의 품을 강제로 떠나고 다른 사람과의 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렇게 불행한 삶을 지속해야 하는 EO의 앞에 그를 잊지 못한 주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난다. EO는 주인을 마주함으로써 잠깐의 희망을 얻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인은 EO를 다시 한번 떠나고 만다. 첫 번째의 이별에서는 EO는 절망감에 빠졌다.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당근조차 거부하고 우울한 내면에 잠식당해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이별에선 EO는 자신의 삶의 자유를 찾기 위해 행동한다. 울타리를 부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이지만, 자신의 찬란한 삶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하여 모험을 택하였다. 그런 EO의 다사다난한 미래를 암시하듯 영화는 드넓은 숲과 자연을 버즈 아이 숏으로 강렬하게 담아낸다. 그렇게 EO는 어느 한 마을에 다다른다. 하지만 마을에 다다른 동시에 소방관들에 의해 잡히고 만다. 소방관들에 의해 옮겨진 곳은 어느 한 조기축구 대회 현장이었다. 축구는 홈 팀의 승리였다.

 

그들은 본인들의 승리가 EO의 뜬금없는 출연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승리의 축배를 드는 파티에 EO를 데려간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들의 승리의 아이콘을 학대한다. 담배 연기를 뿜고, 술을 먹인다. 그렇게 EO는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뒤 건물 밖 들판에서 숨을 고른다. 하지만 그들의 승리의 기쁨도 잠시, 그들에게 패배를 한 원정 팀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무기를 들고 그들의 파티 현장을 습격한다. 그리고 본인들의 패배의 원인이라 생각하는 EO를 죽기 직전까지 구타한다.

 

이렇게 영화는 또다시 순수한 당나귀의 눈을 통해 세상의 잔인함을 담는다. 인간들은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를 깔보고 그저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하는 용도로만 쓴다. 그런 인간들의 위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EO에게선 그들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미안함과 처연함이 몰려온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찾아 스스로 고난의 길을 나선 EO에게 신이 기적이라도 내린 듯이 사람들에 의해 구출되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한 생명을 되찾고 깨어난 곳은 도축장이었다.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위치에서 인간의 욕망과 잔인함에 희생당하는 동물들을 보고 EO는 자신을 끌고 온 사람을 걷어차 기절시킨다.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동물들의 목숨쯤은 자신들의 산물로 여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목숨이 위협당할 때는 비굴하게 적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것은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텐 강한 인간의 위선이며,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중죄이다.

 

인간을 걷어찬 EO는 자신보다 아래의 존재가 본인에게 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분개한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또다른 지옥으로 끌려간다. EO를 싣고 지옥으로 인도하는 트럭 운전사는 또 어떠한 인간상을 지닌 악마일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트럭 운전수는 중간에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 위해 마트에 들려 음식을 사 먹는다. 하지만 트럭 운전수가 먹는 음식을 보고 거지꼴로 보이는 소녀가 그에게 경계심을 품으며 다가오자, 그는 안심하라는 듯이 먹던 음식을 바닥에 내려놓고 소녀에게 양보한다. 그리고 자신의 트럭에 더 맛있는 음식들이 많이 있으니 와서 같이 먹자고 제안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번엔 감독이 인간의 선한 면을 비추겠다는 의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관객의 그런 희망 또한 잔인하게 짓밟아버린다. 음식을 먹으러 자신의 트럭에 온 소녀에게 음식을 줬으니 성관계를 맺자고 제안한다. 소녀의 나이는 정확히 언급되진 않았지만 미성년자로 추정된다. 그렇게 욕망에 지배당한 인간상을 EO의 눈으로 비추며 영화는 점점 인간의 선함에 대한 희망을 잃어간다. 소녀는 그 말을 듣고 도망가고, 트럭 운전수는 소녀와 한패로 보이는 남자에게 살해당한다. 그렇게 EO는 또다시 이 잔인한 세상에 홀로 놓인다.

그러자 이번엔 휴게소를 지나가던 남자가 다가와서 EO를 데리고 간다. 하지만 이 남자의 등장은 지금까지 나왔던 인간들과는 다른 인상을 품긴다. 유기된 EO를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품고, 생명답게 대해주는 듯한 말과 행동을 보인다. 그렇게 영화는 다시 한번 관객에게 인간에 대한 약간의 희망을 쥐어준다. 그러나 감독은 그 희망을 끝까지 유지시킬 생각이 없다. 그 남자는 알고 보니 도박이라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성스러운 종교집단에서 쫓겨난 타락한 성직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EO와 함께 도착한 곳은 자신의 새엄마의 집이었다. 새엄마는 돈이 많은 부르주아였기에, 그녀에게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과오를 뒤덮어주라는 것이었다. 새엄마는 화를 내며 그를 적대적으로 대하지만, 남자는 새엄마를 유혹하는 자세를 취한다. 하나님에게 삶을 바치겠다 맹세한 이들도 결국 인간의 타락한 내면인 부와 성욕에 대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저지른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온갖 부조리함과 모순에 아랑곳하지 않고 죄를 저리르는 악마의 본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들은 결국 순수한 동물의 삶마저 침입한다. EO는 그러한 남자와 여자 곁을 떠나 또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난다. 그렇게 길을 걷던 EO는 어느 한 목장에 다다른다. 목장에 있던 소들과 함께 인간에 의해 우리 안으로 떠밀려 들어간다. 그렇게 좁은 통로를 지나 도착한 곳을 카메라는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는다. 오로지 검은 화면과 함께 알 수 없는 소리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 소리와 소들의 상태를 보아 추측건대 EO는 결국 공기총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연에서 비롯되었지만, 인간의 손에서 길러져 그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믿는 EO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행복인 주인을 찾아 전국을 떠돌면서 타락한 세상 속 악마적인 인간들에 의해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고 결국 그들에게 죽음을 맞이한다. 언제부턴가 지옥으로 변해버린 타락한 세상과 그런 세상을 순수함의 결정체의 동물의 눈으로 비춤으로써,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보여주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깨끗한 동물의 순수함과 자연을 여과 없이 비추는 클로즈업과 롱 샷이 기능적으로 아름답게 작동된다. 특히 EO의 눈을 어떠한 부연 설명 없이 클로즈업만으로 비추는 감독의 태도는 동물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함을 꿋꿋이 믿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처연한 예술적 숏으로 다가온다. 당나귀 'EO'를 통해 현실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연출은 끝내 마음 한구석에 씁쓸함만을 남긴다.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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