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론자의 낭만주의 - 에릭 로메르 <녹색 광선>

2022. 10. 24. 15:33장문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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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CGV에서 10월 5일부터 11월 2일까지 열리는 에릭 로메르 특별전을 통해 누벨바그 시대의 거장이라 불리우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작품들을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에릭 로메르는 영화계에서 명실상부한 거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감독인 홍상수와도 비슷하게 맞닿아있는 지점이 있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정작 그의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음에도 그 기회들을 빈번이 놓쳤었다.

 

그에 대한 몇 가지 변명을 늘어놓자면, 첫 번째로 세상에는 보고 싶은 영화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려고 마음을 먹어도 결국 구로사와 아키라를 보게 되고, 구로사와 아키라를 마주한 다음 보려고 해도 그 다음에는 장 피에르 멜빌이 그 앞을 막았다. (사실 저 두 감독들이 에릭 로메르보다 더 끌렸던 걸지도...) 두 번째로는 나는 지방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에릭 로메르의 특별전은 수도 없이 열렸었다. 하도 많이 열리다 보니 '또메르'라는 별명이 생겼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특별전들은 모두 서울에서만 열린다. (아님 부산 영화의 전당 정도?)

 

그렇기에 돈도 시간도 없던 학생의 신분으로는 영화 한 편을 보러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하튼 여러 가지 이유로 에릭 로메르와의 만남을 늦추기만 했던 내가 드디어 그의 작품들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이다. 드디어 그의 작품들을 7편 정도 보고 난 후, 그 중 가장 좋았던 영화인 '녹색 광선'에 대해 짧은 소견을 남기고자 글을 쓴다.

주인공인 델피는 휴가를 맞아 친구들과 바캉스를 가기로 한다. 하지만 친구 측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바캉스를 일방적인 통보로 취소해버리고 순식간에 2주 동안의 계획이 없어진 델피는 홀로 남겨진다. 그런 델피는 자신이 버려졌다 생각하고 금방 우울의 늪에 빠지고 만다. 델피는 단순히 바캉스 계획에 자신이 빠지게 되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된 것만 같은 생각 때문에 우울해진 걸까? 영화를 다 본 개인의 입장에서는 델피는 원래부터 우울증을 동반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사람이란 원래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살아간다. 희망찬 낙관주의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델피처럼 선천적으로 부정적인 생각과 우울증을 달고 살아가는 이들도 분명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바캉스에서 자신이 빠지게 된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절망감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은 그런 델피를 도와주기 위해 남자친구를 만나라고도 해보고, 혼자 바캉스를 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보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의 조언은 델피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친구들의 조언엔 진심이 담겨있을지라도 결국엔 가장 중요한 델피의 개인적인 생각과 가장 필요한 공감이 공허한 조언이기 때문이다. 우울증, 즉 내면이 공허한 델피에게 과연 저런 직관적일 뿐인 조언이 도움이 될까? 물론 델피의 행동이 너무 부정적인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델피는 백마 탄 왕자가 자신에게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낭만주의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 우울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친구를 옆에 두면 자신도 덩달아 우울의 늪에 빨려 들어가는듯한 기분이 드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진정한 친구 또는 가족이라면 상대방의 기분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관객의 입장에서 델피를 보고 짜증이 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지만, 델피와 같은 성격을 가진 관객이라면 그 누구보다 델피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델피도 최소한의 노력은 한다. 바캉스가 갈 친구가 없어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혼자 바캉스를 떠나보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지만 왕자님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위치에 가기까지는 순전히 본인의 의지로 해낸다. 이것이 델피라는 캐릭터를 응원하고 싶어지는 부분이다. 우울하다고 밑도 끝도 없이 자괴감에 빠져 그 무엇도 노력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영원히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삶을 살다 죽을 운명을 받아들이는 패배자의 인생으로 귀결된다.

 

물론 우울증이 매우 힘든 마음의 병인 것은 잘 알고 공감되지만, 그곳에서 빠져나오려면 타인의 도움 이전에 본인의 의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델피는 부정적인 동시에 삶의 희망 또한 보이는 역설적이면서도 다중적인 캐릭터로서 작용한다. 노력의 첫 출발지인 친구의 가족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흥미로운 숏이 등장한다. 델피는 친구와 그의 가족들과 식탁에 앉아 대화를 하는데, 본인은 채식주의자라는 것을 마치 자신이 채식주의자라는 합당한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큰일이 날 것처럼 오바하면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약간의 사회부적응자 느낌이 날 정도로)

 

그 장면에서 감독은 클로즈업과 패닝 쇼트를 이용한 롱테이크 위주로 대화하는 피사체들을 숏에 담는다. 하지만 대화하는 주체들을 한 화면에 담거나 서로의 대화를 경청하는 듯한 컷편집을 배제하고, 델피와 주위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한 화면에 담지 않거나 패닝 쇼트로 밀어내는 듯한 연출을 가미한다. 이러한 카메라의 기능을 통해 단순한 대화씬으로 보일 수 있는 상황을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결국 혼자가 되고 마는 델피의 심정을 대변하는 방식으로써 사용한다. 에릭 로메르는 숏의 장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훌륭한 장면이었다.

델피의 첫 도전은 그렇게 실패로 끝나고 델피는 또다시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델피는 한번의 실패해 굴복하지 않고 헤어진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별장에 놀러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는 저녁 6시나 되어서 돌아온다고 하고, 결국 델피는 또 혼자서 별장 근처의 산을 방황하다가 우울의 늪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고 만다. 하지만 델피는 우연히 만난 옛 친구의 의견에 따라 친구의 동생이 소유하고 있는 펜션이 있는 해변으로 세 번째 도전을 향해 나아간다.

 

그곳에선 친구의 조언대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까지 한다. 새로 만난 친구는 델피와 정반대의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여행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즐기고 심지어는 약혼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자들과 노는 것을 즐기기까지 하는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의) 낙관주의자였다. 그 친구는 소극적인 델피에게 먼저 다가와주고, 같이 어울리며 델피를 챙겨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둘의 대화에서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친구는 델피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쳐내면서 방어적인 태도만 취하면 그 남자가 너가 원하는 백마 탄 왕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하지만, 델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만 우긴다. 친구는 그런 델피의 신념을 깨트려주겠다는 듯이, 건너편에 앉아있는 두 남자에게 말을 걸고 같이 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델피는 그 남자들 또한 강력하게 거부하며 결국 세 번째 도전도 실패로 끝나버린다. 그래도 이러한 실패 속에서 얻은 교훈 하나 정도를 뽑아보자면, 돌담에 걸터앉아 녹색 광선을 보면 타인의 진심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노인분들의 이야기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한 델피는 짐을 싸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역으로 간다. 하지만 그 역에서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한 남자를 만난다. 전의 델피였으면 그 남자 또한 무시하고 집에 와서 자괴감에 빠졌겠지만, 이번엔 델피는 그 남자에게 호의적인 자세를 취한다. 역에서의 포근한 델피와 남자의 대화는 두 피사체를 한 숏에 담는 투 숏으로 촬영하여 델피에게 백마 탄 왕자님이 왔다는 듯한 희망을 살며시 내포한다.

 

하지만 뒤이어 남자와 간 카페에서는 또다시 자신의 남자에 대한 염세적인 신념을 (굳이) 늘어놓으며 첫 장면의 델피로 회귀하려 한다. 이 장면은 초반부의 친구 가족들과의 식탁씬처럼 클로즈업과 패닝 쇼트를 통해 타인을 밀어내려는 연출을 한 번 더 사용함으로써, 역에서 살며시 보였던 희망을 다시 닫아버리는 절망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델피를 품어낼 백마 탄 왕자님이었던 것일까? 이번에의 델피는 도망치지 않고 남자에게 해가 지는 것을 보러 가자고 제안한다.

 

남자는 먼저 다가와 준 자신의 앞에서 여자에게 다가오는 남자는 모두 흑심을 품은 것이라 말하는 델피의 행동에도 불편해하지 않고 묵묵히 델피의 곁에 있어준다. 그리고 결국 델피는 찬란한 해질녘의 바다에서 녹색 광선을 봄으로써 모든 여정의 마무리를 장식한다. 물론 그 남자가 델피가 생각하는 백마 탄 왕자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울증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최소한의 노력을 하는 델피와 그런 델피를 품어줄 가능성이 있는 남자의 만남에 신은 그들에게 조그마한 기적을 허용한다.

결국 아무리 삶이 힘들고 지칠지라도, 그런 삶에서 빠져나고픈 최소한의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신은 그런 인간의 노력에 보답하여 기적을 주리라는 희망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에릭 로메르의 낭만적인 시선이 아름답다. 에릭 로메르가 스토리텔링과 캐릭터를 다루는 능력 그리고 숏의 장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그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보진 않았지만, 감히 그의 최고작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황홀한 영화적 체험이었다.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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