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다층적인 형태 - 루카 구아다니노 <본즈 앤 올>

2022. 11. 30. 11:54장문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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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본즈 앤 올'이 개봉에 앞서 이동진의 언택트톡을 통해 미리 접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매를 했다. 이번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소식과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뜨거운 반응, 무엇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만든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티모시 살라메와의 재결합까지. 미리 볼 수 있는 기회를 날릴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물론 필자는 아무리 기대작이 있다 할지라도 그 흔한 예고편이나 영화에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지 않는 스타일이기에, 이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은 루카 구아다니노와 티모시 살라메의 두번째 작품이라는 점과 카니발리즘을 다룬 파격적인 로맨스 영화라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영화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부분 기대감만을 안고 영화를 접하였고, 나의 기대 이상을 충족시켜 줄 영화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직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서스페리아' 밖에 접해보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 두 개의 작품보다 연출적인 면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전혀 융합될 것 같지 않은 카니발리즘과 로맨스라는 장르를 탁월하게 혼합하고 특정 씬의 분위기에 따른 연출의 완급조절이 매우 훌륭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서스페리아'에서 다뤄본 로맨스와 서스펜스를 적절히 가미하여 탁월하게 융화시킨 작품으로 느껴졌다. 어떠한 면에서는 그 둘의 작품보다 더욱 완성도가 부각되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부터 이 작품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들을 조약한 글로나마 옮겨보자 한다.

영화 '본즈 앤 올'은 카니발리즘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무언가 '다른' 본능을 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삶이자 위로, 희망 그리고 동시에 절망을 담은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카니발리즘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는 여성 '매런'과 남성 '리'의 삶을 로드무비 형식으로 담아낸다. 이들은 각자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남들과는 다른 카니발리즘이라는 본능 단 하나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인간의 당연한 권리를 박탈당한 삶을 살게 된다.

 

리의 경우에는 자신 스스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나머지 가족을 두고 스스로 떠난 케이스이지만, 그런 비극을 만든 원인은 결국 남들과는 다른 어떠한 본능 때문이기에 자의적인 독단이 아닌 본능에 의한 박탈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매런과 리와 같은 삶은 그들만의 삶이 아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동성애자, 장애인 등 대부분의 사람들과 무언가 다른 소수의 사람들의 삶에도 접목시킬 수 있다. 그들 또한 매런과 리처럼 그러한 몸을 같고 태어나고 싶었던 것이 아닌, 오로지 선천적인 발단에 의해서다.

 

그렇다고 우리들과 다른 그들이 잘못된 것인가? 그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매우 이기적이고 현대에서 뒤떨어진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모두가 이러한 윤리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진 않는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들의 불행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고 본인의 이익만을 취하며 발전해 온 존재들이다. 미국의 흑인 노예제도 대표적인 증거이다.

 

물론 그 시절의 보수적이고 윤리적으로 어긋난 사상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아직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은 존재할 것이고 인간의 은연중에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은 배척해야 한다는 본능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선조들의 당연한 행위였고, 우리는 그러한 선조들로부터 파생된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매런의 본능으로 인해 일어난 사고를 수습하고 도피와 같은 생활을 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결국 딸의 삶보다는 자신의 자유로운 삶이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을 하여 매런을 버리고 도망가고 만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딸을 버린 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되고 비인간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아버지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보자.

 

자신의 목숨도 바칠 수 있을 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을 낳았지만, 그 딸이 3살 때 자신의 베이비시터를 먹고 난 뒤부터는 평화로운 삶은 영원히 꿈꿀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딸이 자신의 본능을 제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딸이 사고를 칠 때마다 자리 잡은 터전에서 오로지 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도망쳐야만 했다. 그렇게 십수 년을 평화로운 삶과 자유를 박탈당한 채 딸만을 위해 산 아버지의 심정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평화와 자유는 삶의 안정을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권리이고 만끽하고 싶은 당연한 욕구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욕구와 의지를 거세당한 삶, 즉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잘 참아오던 딸 다시 깨버린 삶의 요동에 결국 참지 못하고 십수 년 동안 억압하고 있었던 욕구와 권리 그리고 인내의 보따리가 터져버린 것이다. 딸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딸의 힘든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아버지이지만, 그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개인의 삶을 가진 인간이기에 매런을 버릴 수밖에 없는 잔인하지만 타협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아버지의 부성애는 하늘을 초월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는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인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성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성애가 있었기에 그녀를 십수 년간 돌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딸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택한 아버지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를 보며 흐느끼는 딸을 비추는 숏을 볼 때에는 순간 아버지가 너무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매런과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아보지 않았고, 그들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둘 중 한 명의 편을 들기보단, 그저 그들의 비극을 보며 연민하는 제3자인 관객이 입장을 고수할 뿐이다.

매런은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남긴 출생증명서와 약간의 돈 그리고 떠나간 어머니에 대한 과거가 녹음되어 있는 테이프를 들고 어머니를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여정의 출발이 얼마 되지 않은 무렵, 매런은 자신의 똑같은 카니발리즘의 본능을 지니고 있는 '설리'라는 남성을 만나게 된다.

 

매런은 난생 처음 만나는 그의 살가운 모습에 경계를 하지만, 곧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본능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신기함과 안도감에 그를 따라간다. 하지만 카니발리즘이라는 본능에 인간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윤리성마저 잡아먹힌 그의 끔찍한 언행에 환멸을 느끼고 그에게서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은 본능에 삶 자체를 지배당한 괴물이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영화는 세상엔 어둠이 있다면 빛 또한 있다는 낙관을 옹호한다는 듯이, 세상에서 거부당한 매런을 그녀와 같은 처지에 놓인 '리'라는 남자아이와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성사시킴으로써 희망을 선사한다. 둘은 그동안 저주라고 생각하던 자신들의 본능을 혐오하고 무서워하며 세상을 살아갔지만, 비슷한 삶을 살아온 둘을 만남으로써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버팀목 역할을 하며 빛과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는 새 삶을 얻게 된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지만, 서로에게 운명 같은 이끌림을 느낀 둘은 그들의 인생에선 평생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리는 매런의 어머니를 찾는 여정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여동생을 만나고 놀이공원에도 놀러 가는 등 점점 가까워진다. 하지만 그들의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은 매런의 어머니를 만나고 나면서부터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매런의 어머니는 어느 한 작은 마을의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본능을 경멸하여 다시는 사람을 먹지 못하게 스스로 양 팔을 자르고 병원에 갇혀 지내며 약을 먹으며 카니발리즘을 억누르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아버지와도 자신의 본능을 숨기고 결혼을 하였다가 매런에게 카니발리즘이 유전이 된 것을 보고 나서야 실토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같이 살 수 없다는 판단을 하여 헤어질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노력으로 보듬어 주었으면 됐을 터인데 왜 자신을 떠났냐고 한탄하는 딸에게 카니발리즘은 저주라며 딸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필두로 딸을 먹으려 드는 미친 짓까지 감행한다.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매런은 자신의 이러한 본능에 환멸을 느끼고 이 저주받은 삶에서 사랑과 자유라는 감정은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염세적인 결말을 내리고 리를 떠나고 만다. 그렇게 스스로 리를 떠난 매런은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지만, 자신의 어두움만 가득했던 인생에서 처음 느껴본 사랑이라는 빛을 잊지 못하고 결국 다시 리를 찾아간다.

 

그렇게 매런과 리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게 된다. 광활한 대지의 언덕 위에서의 키스씬은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들의 사랑을 예찬하듯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을 롱 숏으로 잡고 그들의 키스씬은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그리고 클로즈업에 담겨진 둘 사이에 자연광을 부드럽게 담아내어 그들의 아름다운 감정선에 찬미를 불어넣는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느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아름다움의 최고치를 또다시 느낄 수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둘은 한 마을에 정착하게 되고, 본능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인간답고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된다. 둘은 서로를 통해 영원히 경험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랑과 평화로운 삶을 쟁취한 것이다. 남들이라면 당연하게 누리느라 행복한 줄도 몰랐던 것들을 그들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 감격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렇듯이 세상에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될 것들조차 누리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그 평범함을 삶의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지만 평화로운 삶도 잠시, 매런의 뒤를 쫓던 설리에 의해 매런은 리가 잠시 집을 비웠을 때 설리의 습격에 당하고 만다. 리는 집에 귀가하다 매런의 목에 칼을 들이밀며 위협을 하던 설리를 보고 매런을 구하기 위해 그와 몸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그의 칼을 뺏어 죽여버리고 만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몸싸움의 과정에서 칼에 리의 복부가 찔리고 만 것이다. 급소를 찔린 리는 과다출혈로 죽어가게 되었고, 살인을 저질렀기에 경찰에 신고하거나 병원에 가면 매런이 잡힐 것이라는 판단을 한 리는 자신을 먹어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던 매런에게 온 몸을 먹히는 비극을 맞이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그들의 어두운 현실을 비추며 시작했지만, 곧내 같은 본능과 아픔을 가진 둘을 마치 운명처럼 만나게 하여 영화적 기적을 선사하였다. 하지만 감독은 잔인하게도 그들에게 가져다 준 기적을 다시 스스로 뺏어가며 끝을 맺는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감독의 연출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무언가가 '다른' 사람들도 사랑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만, 사랑을 넘어서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까지 원하기에는 아직 세상이라는 차별이 난무하는 시대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염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요즘에는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문화 콘텐츠에서도 적극적으로 pc 운동을 벌이며 인종차별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을 타파하려는 시도가 많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예전에 비해서는 인식이 많이 좋아진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적이고 편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지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카니발리즘과 같은 극소수의 본능은 물론이고, 이제는 익숙하게 된 동성애자나 여러 인종들 중 누군가는 극 중 매런과 리처럼 이 세상에 섞이지 못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아직 동성애자와 자신과 다른 인종들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는 이 세상에선, 카니발리즘을 가진 이들이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먼 미래의 일로만 보인다. 어쩌면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할 염원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런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하여 카니발리즘과 로맨스라는 장르를 혼합하여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 영화이자 사회고발 영화를 만들어냈다.

 

감독의 전작들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의 로맨스와 '서스페리아'에서의 스릴러적인 요소를 한 영화에서 탁월하게 다룰 줄 아는 감독의 역량이 돋보인다. 특히나 감독 스스로 특정 씬마다 로맨스와 스릴러 중 어느 곳에 힘을 실어줘야 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심지어 클로즈업과 줌 인 그리고 음악 등의 활용으로 그러한 점을 탁월하게 실천해내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연출력이 놀랍다. 앞으로 그의 신작들은 어떠한 장르가 나와도 믿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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