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행복은 1등석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제임스 카메론 <타이타닉>

2023. 2. 17. 16:30장문 영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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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런 영화들이 있다. 너무나도 유명해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꼭 한 번쯤 거쳐가야만 할 것 같은 작품이지만, 막상 영화를 재생하려고 하면 엄두가 안 나는 영화들 말이다. 그러한 마음이 들게 하는 데에는 크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제일 큰 이유는 영화가 너무 유명해서 스토리와 결말은 물론 특정 장면들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다. 타이타닉 같은 경우는 남녀 주인공이 죽는다던가 알몸 스케치 장면 그리고 팔을 벌리고 자유를 만끽하는 장면 등 영화의 제목만 들어도 수많은 숏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정작 영화는 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러한 이유가 그동안 타이타닉을 보지 않았던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말 그대로 영화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다. 나도 나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약간의 반골 기질이 좀 있는 것 같다. '너무 유명해서 다른 사람들도 다 봤을 법한 영화를 굳이 내가 다른 볼 영화도 많은데 이 영화를 시간 내서 봐야할까?' 라는 반골 기질이 나도 모르게 내면에 둥둥 떠다녔던 것 같다. 아무리 유명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봐서 평가가 굳어진 작품이라 할지라도, 나만의 영화적 신념을 가지고 작품에 임하면 될 것을. 여하튼 나의 이런 지겨운 아집을 이겨내고자 하기로 마음도 먹을 겸, 아직 타이타닉도 보지 못한 겸 해서 이번에 개봉 25주년 기념으로 국내에서 재개봉한 타이타닉을 보러 동네 극장에 일에 찌들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갔다. 솔직히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까지도 3시간이 넘는 영화를 피곤한 몸으로 봐야 한다는 점과 굳이 3D만으로 재개봉을 강행한 영화사의 선택에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 영화가 왜 이렇게까지 유명하고 25년이 넘어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인지 체감하게 되었다.

 

일단 이런 적당히 유명한 정도가 아닌,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봤다 싶을 정도로 유명한 영화들은 보기 전부터 편견을 가지고 영화에 임하게 되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그러한 영화들을 볼 때 드는 대표적인 생각들은, '익히 들어온 명장면 말고는 건질만한 부분들이 없는 영화가 아닐까?' 또는 '사람들이 다 명작이라고 칭송하는데 안 봐도 명작이겠지~ 대충 보자'와 같은 마음이다. 물론 타이타닉은 익히 들어왔던 명장면들은 역시나 훌륭했다. 타이타닉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로즈(케이트 윈슬렛)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듯이 두 팔을 펼치는 장면을 마주했을 때는 약간의 전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장면은 단순히 영화의 낭만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져 나온 아름다운 이미지가 아닌, 영화의 메시지를 관통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 로즈라는 캐릭터의 인생사를 한번 생각해보자. 영화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로즈는 태어날 때부터 귀족의 피를 머금고 세상에 나왔다. 그렇기에 로즈의 자유의지는 태어남과 동시에 박탈당하고, 상류층의 문화와 가치관을 강제로 흡수당하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삶 속에서만 살아왔다. 그러한 삶을 살아왔던 로즈이기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와 신념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흥미를 느낀다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감정선이다. 오히려 가난한 서민 출신인 잭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잭의 신분에 편견을 가지지 않고 사람의 내면 자체만을 바라보는 로즈라는 인물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다시 직전에 이야기했던 명장면으로 돌아가보자. 타이타닉호의 1등석에만 갖혀 행복하지 않은 초호화 여행이라는 아이러니를 겪고 있던 로즈는 잭의 자유로움과 낭만에 매혹되어 1등석에서 빠져나와 배의 앞머리에 있는 난간에 올라가 탁 트인 바다와 바람을 맞으며 자유를 만끽한다. 잭은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있는 로즈를 보고 자신에게 몸을 맡기고 난간을 잡고 있는 손을 놓으라고 주문한다. 로즈가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잡고 있던 난간은 로즈의 자유를 옥죄이던 상류층의 압박을 상징한다. 하지만 끝내 삶의 자유를 상징하는 잭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손을 놓는다는 것은 곧 스스로의 선택으로 상류층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를 찾아 나서겠다는 그녀의 당찬 포부로 읽힌다. 그러므로 이 명장면은 단순히 사랑의 낭만만으로 빚어진 아름다움이 아닌, 영화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관통하는 자유 그 자체를 담은 숏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대단하다고 느낀 부분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후반부의 타이타닉 침몰 시퀀스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타이타닉 침몰을 표현한 CG의 웅장함이 아니다. 바로 타이타닉의 침몰 속에서 일어나는 아비규환을 그려낸 상황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비규환 속 인간의 이기심이 어디까지 치닫을 수 있는지에 대한 사회 윤리학적 실험을 상징하는 칼이라는 캐릭터는 여느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캐릭터이다. 하지만 타이타닉이 3시간 동안 착실하게 쌓아올린 스토리의 빌드업 끝에 마주하는 칼의 인간 군상은 뻔하지만 타 영화들과는 한 단계 높은 지점의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난 타이타닉이 이리 잔인한 영화일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 타이타닉은 잭과 로즈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만이 주가 되는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이타닉이 침몰하면서 질서가 파괴되자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여 승객 한 명을 총으로 쏴 죽이고 죄책감 때문에 본인 또한 자살한 직원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지만, 제일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영하의 바닷속에 빠져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롱 샷으로 담은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칼과 같은 캐릭터는 흔히 말하는 영화에 누구라도 욕할 수 있는 악당을 만들기 위한 구조적인 인물로서 영화에서 작용한다. 그렇기에 영화 속 칼의 이기심과 잔인함을 보아도 관객들은 충격을 먹기보단,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하지만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바다에 빠져 조그마한 희망도 없이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비명을 지르며 죽음만을 기다리는 상황을 롱 숏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영화의 주연급인 잭과 로즈 그리고 칼을 보면서 우리는 '저 상황에 내가 있으면 어땠을까?'와 같은 상상은 잘 하지 않는다. 그저 영화에 보여지는 캐릭터들의 상황 그 자체에만 몰입한다. 애초에 그렇게 구성된 서사와 캐릭터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은 재난상황에서의 우리들의 모습으로 충분히 이입을 시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타이타닉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들의 상황보다 물에 빠진 한 사람의 상황이 우리에게 더욱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재난은 언제나 우리의 삶 곁에 머물러있다. 어려서부터 뉴스나 소문 등을 통해 재난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수많은 비극들을 들어온 우리들의 입장에선,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보다 죽어가는 승객들의 비극이 더 눈에 들어올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장면들로 타이타닉은 단순히 잭과 로즈의 로맨스 그리고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메시지만을 가진 작품이 아닌, 재난영화로써도 가치를 다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화의 끝에 도달하였을 때 남는 여운은 서사의 웅장함에서 마주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 명징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행복은 1등석에서만 존재할지라도 돈으로는 절대 쟁취할 수 없는 삶의 낭만이 3등석에는 존재한다. 그렇기에 1등석의 환상만을 좇는 삶을 살기보단, 3등석이라는 주어진 위치에서 본인만의 행복을 만끽하는 삶을 살 도전의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는 카메론의 삶을 대하는 자세가 영화에 깊게 서려있다. 결국 난 많은 편견을 가지고 봤던 '타이타닉'에 끝내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고전들은 왜 시간의 흐름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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